한국의 明堂 - 景福宮과 청와대
창경궁 영화당 부근 十字脈 위에 청와대 건축해야
⊙ 정도전 주장 따라 북악 아래에다 正宮인 景福宮 건축
⊙ 세종시는 主山이 약해 명당 요건 못 갖춰
⊙ 무학대사 주장대로 왕궁을 인왕산 아래로 정했다면…
대한민국의 심장 청와대. 풍수지리학적 입장에서 봤을 때 청와대 터는 명당인가.
결론부터 말해 청와대 터는 명당이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그곳을 잠시 주인으로서 사용했던 역대 대통령들의 ‘좋지 않았던 끝’이 그 방증이기도 하다. 근래에 치러진 대선(大選)에서는 청와대 이전이 대선공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유력 후보 중 한 분이 청와대 이전을 공약했다.
청와대 이전 공약이 국민과의 소통 문제 등 풍수지리학적 관점과는 다른 차원에서 거론됐을 가능성이 높지만, 풍수 전문가 입장에서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옮기려 한다면 더 반가울 것 같다.
대한민국의 심장인 청와대는 왜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명당에 터 잡지 못했는가. 그 이유의 연원은 조선왕조(朝鮮王朝) 개국(開國)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확히는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의 청와대 자리는 고려 숙종 9년 남경(南京·한양·고려 시대 3경의 하나)의 이궁(離宮·임금이 머물던 왕궁 밖 별궁으로 행궁이라고도 한다)이 세워진 자리다. 남경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1067년(문종 21)인데, 남경 궁궐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다. 문종이 남경을 설치한 동기는 《도선기(道詵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에 있는 삼각산 아래 지역이 제왕(帝王)의 도읍이 될 만하다는 내용의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을 믿었기 때문이다. 남경은 몇 년 뒤 폐지되었다가 1104년(숙종 9)에 이르러 다시 설치되었다.
遷都를 둘러싼 百花齊放식 논의
창경궁에는 청와대를 옮겨도 좋은 터인 십자맥이 있다.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조를 전복한 이성계(李成桂)는 1392년 7월 고려의 수도 송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다. 역사상 혁명으로 새 왕조를 개창한 사람이나 집단은 거의 예외 없이 새로운 수도를 물색한다. 태조 이성계 역시 왕위에 오른 다음 달에 한양(漢陽)으로의 천도(遷都) 준비를 지시한다.
수도 이전을 공약했던 고(故)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마음도 그러했으면 오히려 좋았으련만 “(선거에서) 재미 좀 봤다”고 말했던 점으로 미루어 정치적 의도가 더 많았던 것 같아 아쉽다.
이성계가 수도 이전 장소로 심중에 두었던 곳이 한양이다. 한양에는 이미 고려왕조의 이궁이 있었으므로 그 이궁을 간단히 수리해 일단 수도를 옮겨놓고 궁궐 건설은 천천히 해도 되리라는 심산이었다. 태조의 명을 받은 도평의사사(일명 ‘도당’으로 불리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국가의 최고 의결기관이자 집행기관)의 이염이 한양에 있는 이궁의 수리를 위한 기초작업을 하던 중, 개국공신으로 이성계의 오른팔이었던 조준이 “도읍지 선정은 천년지계(千年之計)이므로 서둘지 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조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긴 태조는 일단 천도 계획을 유보한다. 태조 2년인 1393년 정월, 권중화가 계룡산 기슭을 새 도읍지로 천거했다. 직접 현장을 답사한 태조는 흡족해했다. 권중화에게 새 수도 설계 계획을 맡겼다. 계룡산 기슭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려는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번에는 하륜이 상소를 올렸다. 새 수도 후보지를 답사한 하륜이 “신도안의 형세가 풍수지리학상 명당과는 거리가 먼 땅인데다 협소하여 천 년 사직의 터전으로는 부족하니 당장 건설사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였다.
하륜의 상소를 받고 고민하던 태조는 결국 새 수도 건설사업을 중단했다. 그렇다고 해서 태조가 수도 이전의 꿈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신하들은 물론이고 각 기관에 수도 이전에 관한 견해를 내놓도록 하는 등 논의를 더욱 활성화했다.
계룡산 천도를 반대했던 하륜은 무악 천도를 주장했다. 서운관(書雲觀)이 하륜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섰다. 무악이 길지(吉地)도 아니고 좁다는 이유에서였다. 개성에 그대로 눌러앉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나왔다. 수도 이전을 둘러싸고 백화제방(百花齊放)의 논란이 벌어지자 태조는 무학대사에게 자문했다.
무학은 “한양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아 도읍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정도전이 무학대사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자고로 임금은 모두 남향(南向)하여 다스렸습니다. 동향(東向)하여 다스린 예가 없습니다”하고 반대했던 것이다.
무학대사는 자신의 의견이 꺾이자 “내 말을 좇지 않으면 2백 년 뒤 틀림없이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올 것”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신라 때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산수기(山水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는 이가 만약 스님의 말을 듣고 따르면 그래도 나라를 연존(延存)할 수 있는 약간의 희망이 있다. 그러나 정씨가 나와서 이 문제를 두고 시비하고 그 말대로 따르면 채 5대도 지나지 않아 임금 자리를 뺏고 빼앗기는 재앙이 있을 것이며 도읍한 지 2백 년쯤 된 뒤에는 나라가 위태로운 국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조선왕조의 비극과 경복궁
무학대사가 주장한 ‘인왕산 아래’ 지역은 인왕산과 백악산 등 세 개의 산맥이 모여 하나의 틀을 이룬 명당으로 고려 때 이미 이곳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해서 그 왕기를 누르기 위해 오얏나무(자두나무)를 심었던 곳이다. 무학대사가 어느 날 갑자기 홀로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선인들이 일찍부터 왕도 후보로 점찍었던 자리였던 것이다.
새 도읍지 후보는 무학대사의 주장대로 한양으로 정해졌지만 가장 중요한 궁궐의 위치는 ‘인왕산 아래 동향’을 주장했던 무학대사의 의견 대신 ‘북악 아래 남향’을 주장했던 정도전의 안이 채택됐다. 정도전에 대한 태조의 신임이 두터웠고 새 국가의 기본 틀을 만든 정도전의 말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당시로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풍수적 소견이 정치적 역학에 밀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태조 3년(1394년) 8월, 도평의사사에서 최종적으로 한양을 새 도읍지로 확정하자 태조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했다. 신도궁궐조성도감의 책임을 맡은 심덕부는 곧바로 신도읍지 설계에 착수해 종묘와 사직, 궁궐과 관아, 시전과 도로의 구획을 확정하고 그해 9월 공사에 착수했다. 태조는 그해 10월 송도를 떠나 한양에 입성한 후 고려 이궁에 기거하며 새 나라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새 궁궐이 완공된 것은 태조 4년인 1395년 9월이었고, 정도전은 새 궁궐의 명칭을 경복궁으로 명명했다. 태조는 1년 후인 1396년 9월 새 궁궐에 입어(入御)했다.
그 뒤 경복궁에 터잡은 조선왕조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 정궁인 경복궁의 위치가 잘못 잡히면서 수많은 비극이 일어났다. 우선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이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그 형제의 피 값으로 임금 자리에 올랐고 7대 임금 세조 또한 피를 뿌리며 왕위에 등극함으로써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라는 씨앗을 뿌려 네 번에 걸친 사화를 불러오는 원인을 제공했다. 개국 200년이 경과할 무렵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쑥대밭이 됐다. 그리고 그 왕조의 후손들은 지금 먹고살기가 바쁠 정도로 영락(零落)한 상태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제강점이라는 민족 최대의 수난을 지나 현대 국가를 수립한 후에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이 이어졌다. 역대 대통령 중 혁명으로 하야하거나 암살 또는 자살과 가족 및 본인의 옥살이 등 사고 없이 온전하게 물러난 이가 있던가. 풍수 전문가로서 필자는 경복궁 윗자리에 자리 잡은 청와대의 터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인왕산 아래에다 궁궐을 지을 수도 없고 궁궐이라는 왕조 시대의 건물이 필요한 때도 아니므로 지금은 청와대의 자리를 보정하는 게 시급한 일이라 하겠다.
서울의 地氣는 아직 젊다
세종시는 주산이 약해 명당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일제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조선총독부 부지로 사용하며 그 일부에 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일제는 1939년에 남산에 있던 총독 관저를 경복궁 위에 있던 조선시대 경무대(무과 시험장) 자리에 세우고 이전한다. 광복 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경무대로 변경, 대통령 관저이자 집무실로 사용했다. 이후 청와대로 개명,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최고 권부의 자리로 지칭 대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청와대는 명당에 자리 잡지 못했다. 청와대는 앉은 자리가 너무 높다. 일제 총독이 경복궁을 아래로 굽어보고 조선의 용혈을 깔고 앉기 위해 정한 자리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최고 권부 자리로서는 맞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청와대는 서울시를 내려다보는 북악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다 뒤편의 바위의 갈라진 틈 때문에 골육상잔의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고 본다. 게다가 자하문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골바람 때문에 늘 불안한 형상이다. 자하문 골짜기 건너편 백호를 이루는 산의 높이가 주능선에 비해 3미터 정도 높아 역(逆)의 형상을 치받으면서 숭례문까지 흘러간 것도 서울의 지기를 왜곡하는 원인을 낳았다.
그러나 청룡에 해당하는 좌측방은 멀리 북한산의 용맥이 힘차게 흘러와 전형적인 3맥(脈)을 이루고 뻗어내려 한 가닥은 연지동 서울대학 병원 쪽으로 흐르고, 다른 하나의 맥은 동숭동과 낙산을 형성하는가 하면 마지막 하나의 맥은 창덕궁 규장각과 영화당으로 힘차게 흐르면서 천하대명당인 십자맥(十字脈)을 형성하고 있다.
이 십자맥 위에 청와대를 앉혔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곳에서 보면 청계천과 대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솟아 있는 독산이 수려한 안산(案山)을 이루고 있다. 서울 전체의 형국에서 볼 때도 청계천 하구의 뚝섬과 한양대학교가 올라앉은 구릉이 역시 안산의 역할을 하고 있어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명당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 지기가 바야흐로 이제부터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비상하는 불사조의 형국이라 할 만하다. 수도 서울의 기운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뜻이다.
수도 또는 국가를 상징하는 대도시의 부흥과 쇠락은 그 나라의 문화의 영고성쇠와 궤를 같이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운세는 북서로 물이 빠지는 지역이 번영하게 되어 있다. 한강이 바로 그 경우다. 한강 중에서도 북서로 물이 빠지는 용산 일대가 새로운 번영의 땅으로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적인 운세도 그러하거니와 한강과 청계천이 태극의 문양으로 방향이 엇갈리고 감싸며 남산의 기운이 상응하고 그 속에 생기 넘치는 대명당을 고루 갖춘 서울의 기운은 아직 젊다. 이 기운의 상승세를 제대로 타지 못하거나 소홀히 해버리는 날부터 대한민국의 국운은 기울 것이다.
여기서 신 행정도시인 세종시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기까지에는 백화제방식의 의견이 개진되는 등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세종시는 어떤가. 세종시 건설을 놓고 국가의 미래와 결부해 진지하고도 제대로 된 토론이 있었던가. 충청도 표를 의식한 정치적 판단 때문이 아니었던가.
세종시는 주산이 약해 명당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수도 이전은 어불성설이고 행정도시로서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큰 지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력을 기울여 도시를 조성한 만큼 없던 일로 되돌리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풍수지리학적 입장에서 볼 때 이제라도 교육, 연구 도시로 기능을 바꾸는 것이 국가의 미래는 물론이고 이 도시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낱 풍수의 소리라고만 치부하지 말고 세종시의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진정한 지도자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金聖洙
⊙ 77세. 건국대 경제과 졸업.
⊙ 전매청, 건설부 근무. 한국풍수지리학회 회장. 저서로 《명당》 《운명 디자인》
《명당에서 인물 난다》 등이 있음.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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